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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켑틱스/기타 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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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켑틱(skeptic)에 대한 이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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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kopsa
날짜 : 99-10-23 12:12
조회 : 6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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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2월 10일 기존의 글을 띄기 등 정리했습니다)
'스켑틱(skeptic)에 대한 이해'
한국의사과학문제연구소(KOPSA)는 한국의사과학비평동호회(Korea Skeptics)의 '스켑틱스'로 이뤄진 '스켑티컬 단체(skeptical organization)'이다. '스켑틱'이란 무엇인지, '스켑티컬 단체'의 중심인 '초정상주장조사위원회(CSICOP, 현재는 회의적탐구위원회 CSI)'의 커츠(Paul Kurtz) 회장의 글을 중심으로 제반 내용을 알아본다.
1. 건설적 스켑티시즘
'스켑티컬(skeptical)'이라는 용어는 그리스어의 skeptikos에서 나온 말로서 ' 생각이 깊은' 또는 '캐묻기 좋아하는'이라는 의미를 지녔다. 오늘날 '스켑티시즘(skepticism)'은 과학적 탐구의 근본이다. 스켑티시즘, 스켑틱은 그대로 회의론, 회의론자로 번역되지만 이 경우 '총체적 또는 보편적 회의론(universal skepticism)'과 혼동될 염려가 있으므로 이곳에서는 영어 식 발음을 그대로 사용한다.
'총체적 회의론'이란 감각에 의해 인식되는 실재와 합리적 추론의 유효성에 대한 총체적인 의심을 의미한다. 모든 판단을 유보하는 불가지론자(agnostic)의 입장이 이런 것이다. 철학적으로 이것은 외적 세계의 실재뿐만 아니라 자신의 존재조차도 의심하는 극단적 유아(唯我)론(solipsism)을 가져온다. 윤리학에서 이것은 이성을 불신하고 객관적 윤리적 기준을 부인하는 극단적 주관론(subjectivism)으로 인도된다.
과학에서 '총체적 회의론'은 방법론적 아나키즘(anarchism)으로 나아간다. 오늘날 상대론적 과학론자 또는 포스트모더니스트(postmodernist)의 주장에서 발견하는, 모든 과학적인 입장이 과학계의 단지 편견과 패러다임 이동에 달려있다고 보는 견해가 이런 것이다. 이런 견해가 우리의 학계에 그리고 교육계에까지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그러나 인간은 '총체적 회의론자'로 존재할 수 없으며 어떤 신뢰할 수 있는 기준에 입각해서 사색하고, 행동하고, 탐구해야 한다. 사실상 신뢰성이 있는 기준이 없다면 '총체적 회의론자의 입장' 자체도 더 이상 지탱할 근거가 없어진다. 이 때문에 '스켑티시즘'은 의문에 제한을 부여하는 '선택적(selective) 스켑티시즘'이어야 하며 이렇게 해야만 건설적인 결과로 이어지기 때문에 이것을 '건설적 스켑티시즘(constructive skepticism)'이라고 부른다.
좀 더 설명하면, '선택적 스켑티시즘'의 '선택적'은 (과학의)탐구에서 모든 가정에 동시에 의문을 제기할 수 없으며, 탐구의 문제적 맥락에서 의문을 제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문제는 물론 완전치는 않지만 상대적 증거에 의해 해결될 수 있으며 해결될 때까지 연구자는 판단을 유보한다. 또한 이것은 과학계가 항상 새로운 연구문제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앞서 '완전치는 않지만'이라고 한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느 한 개의 법칙이나 이론이 마지막 또는 궁극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퍼스(Charles Peirce)의 '오류를 범하는 원칙(principle of fallibilism)'에 의해 이해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오류를 범할 수 있으며, 새로운 자료를 발견하거나, 좀 더 정확히 자료에 적합한 대체 가설을 낼지도 모른다.
따라서 과학은 그 이론을 수정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며 항상 스스로 교정하는 기능이 작동한다. 우리는 항상 새로운 아이디어를 배제하지 않는데, 이런 원칙은 기성 과학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이 나오는 전구적(proto-) 또는 초과학(parascience)에도 적용된다. 이 원칙은 또한 '스켑틱'에도 적용된다. 다시 말해서 편견에 의해 초정상 주장의 평가가 방해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발견의 가능성에 대해 '열린 마음(open mind)'을 가져야 한다.
또한 '갈릴레오 원칙(Galileo principle)'이 존중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당대의 지도적 과학자에 의해 지지 받는 기본적 또는 잘 확립된 원리와 상충되거나 그 원리를 전복할 것이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어떤 주장을 거절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새로운 탐구분야의 점에서 그것은 의사과학이라기 보다는 풋내기 전구과학이며 이로부터 나온 새로운 이론이 좀 더 정확하고 옛것을 거절할 필요가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과학의 역사가 증명해 준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건설적 스켑티시즘'에서 중요하지만 모든 환상적인 아이디어나 이론이 과학적 탐구자나 지식인에 의해 정당한 청취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어떤 것은 지나치게 분명치 않고 혼동되어 그 자체 의미 있는 해석을 내릴 수 없는, 이해의 범위를 벗어난 것일 수도 있다. 분명히 우리는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하지만 과학혁명은 탐구자가 모호하고, 신비적이고 직관적인 또는 형이상학적 추정과 틀을 초월하여 의미 있는 질문과 시험될 수 있는 가설로 움직일 때 일어난 것이다. 과학은 어떤 형태의 분별할 수 있는 조리 있고 내적으로 일관성이 있는 이론을 다룬다.
2. 건설적 스켑티시즘과 초정상 현상
이러한 '건설적 스켑티시즘'의 점에서 우리는 초정상 현상의 주장에 의심을 표하는 것은 당연하다. 예지(precognition)나 염력(psychokinesis, PK))을 '선험적(a priori)' 입장으로 해서 또는 개념적 분석에 기초하여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런 현상이 받아들여지려면 그것이 존재한다는 높은 가능성이 있어야 한다. 잘 확립된 관찰이나 가설을 전복시키는 놀라운 주장은 단편적 증거가 아니라 대적할 수 없는 강력한 증거가 있어야 한다. 그 증거는 실험적 오류, 형편없는 프로토콜, 감각적 누설, 그리고 성적 내기(grading)의 오류 등에 의해 오염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흄(David Hume)의 기적(miracle)을 보는 시각과 관련이 있다. 흄은 한 가지 믿음이 다른 잘 시험된 일련의 믿음과 배치되는 상황에서 그것을 받아들이려면 그것을 선호하는 상당한 증거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물론 흄의 원칙을 초정상적 주장을 조롱 삼는 방편으로 이용해서는 안되지만 상당한 증거에 입각하거나 잘 확립된 원리를 위반하는 주장에 대해 조심성 있는 태도를 취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초정상 주장은 '스켑틱'에게 '거증책임(擧證責任)(burden of proof)을 강요하는 주장이라는 점에서 문제가 된다. '스켑틱'은 거증책임은 특이한 가설을 채택할 충분한 증거가 있다고 처음 보여주는 주장자에 있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그 주장을 부정하거나 또는 그 반대의 것을 증명하는 책임이 '스켑틱'에게 지워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한 초정상 현상의 부정을 증명할 경우에 그것이 불가능하다고는 말할 수는 없지만 증명 가능성은 주장의 성격과 적용범위의 구체성에 달려 있다. 만일 사이(psi)나 PK에 관한 문제에서 그러한 현상이 관찰되었다는 특수한 환경이나 조건이 명시되지 않을 경우에 증명 자체가 불가능하다.
또한 '스켑틱'의 입장에서 초정상 주장의 논리적 가능성과 경험적 가능성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이 세상에 네모진 원이 있다고 말할 경우와 같이 어떤 주장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예를 들어 "한 사람이 자신의 장례 식을 볼 수 있다"고 할 경우에 망막이나 뇌 또는 신경계가 없을 경우에 어떻게 볼 수 있다는 것인지, 생각할 것이지만, 논리적 이유로 해서 그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할 수는 없다. 육체와 영혼의 이원론자는 이미 오래 전부터 이런 주장을 해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초정상 주장과 관련된 진정한 문제는 그 주장이 자료와 증거에 기초하여 가능한지, 불가능한지에 관한 것이다.
'스켑틱'은 일반적으로 초심리학적 주장에 대해 두 가지 종류의 비평을 제시하였다. 그 하나는 일상 경험과 자연과학의 잘 확립된 원리를 위배하는 듯이 보이는 초심리학의 개념적 틀에 대한 분석적 그리고 논리적 반대이다. 이 경우 앞서 말한 흄의 원칙, 기적에 반대한 주장이 적용된다. 만일 주장이 경험에 의해 발견된 규칙성에 위반된다면 우리는 확률에 비중을 두어야 하며 이때 가장 높은 확률을 가진 해석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대로 '스켑틱'은 예외적인 주장은 예외적인 증거로 지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만일 초감각적 지각 현상이 존재한다면 이것을 해석할 수 있는 개념적으로 조리 있는 가설이나 이론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아마도 과학의 초기 단계에서는 이것이 불가능하나 이것은 궁극적인 목표이다. 그런데 지난 100년간 제시된 어떤 초심리학의 가설적 추정도 이론으로 개발된 적이 없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두 번째 더욱 중요한 비평은 자료 그 자체의 것이다. ESP, PK, 기타 심령현상을 지지할 충분한 자료 증거가 있느냐는 것이다. 초심리학자들은 그렇다고 말하지만 '스켑틱'은 이를 부인한다. 물론 이 자료는 충분하며, 객관적으로 얻어져야 하며, 재현성이 있어야 한다. 또한 초심리학의 결과 중에는 날조에 의한 것이 많다. 물론 초정상적 자료가 전부 날조된 것은 아니나 역사상 예를 보아 예외적인 조심성을 견지할 필요가 있다.
'스켑틱'의 이런 입장은 초심리학자에게도 도움이 된다. 실험 프로젝트를 디자인하고, 시험하고 해석하는데 있어서 초심리학자들과 협조함으로써 그들의 궁극적 목표 달성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이다. 실험자는 '양(믿는 자)'이나 또는 '염소(믿지 않는 자)'여서는 안되며 가설과 증거를 조심성 있게 비평적으로 평가하며 증거에 기초해서만 판단을 내리는 중립적인 탐구자일 필요가 있다.
3. 여러 유형의 스켑틱스
만일 초정상적 내용, 초심리학의 추론적 이론이 무비판적으로 광범위한 대중에 의해 받아들여진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것은 과학적 탐구와는 전혀 반대의 방향이다. 또한 역사적으로 깊은 뿌리를 가진 마술적, 미신적 믿음 그리고 신비적 종교적 오라(aura)를 '과학의 이름으로' 합리화시켜 주는 것이다. 또한 잡아먹히기 쉬운 대중을 강탈하려고 하는 사기꾼을 위장시켜 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 때 스켑티컬한 비평이 중요하다. 또한 '정체 폭로자(debunker)'의 역할이 중요하다. 정체폭로와 조롱은 과학 내에서는 적절한 위치를 차지하기가 어렵지만 사실에 기초한 근거가 없는 성급한 일반화와 무책임한 주장이 과학적 언명, 의견으로 제공되는 곳에서는 관련성이 있다. 이런 제반 역할을 하는 사람이 '스켑틱'이다.
'스켑틱'의 비평 방법은 여러 가지다. 예를 들어 트루지(Marcello Truzzi)는 크게 경험적(empirical), 개념적(conceptual) 그리고 방법상(methodological) 비평의 세 가지로 구분하였다. 이 중에서 경험적 비평은 증거 없는 주장자체를 대상으로 삼아 실험자의 날조의 가능성, 불완전하거나 불충분한 관찰, 그리고 주장되는 것과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받아들이는 물리법칙과 같은 경험적 일반화와의 배치를 본다.
개념적 비평에서는 초심리학자에 의해 제시된 기본 분석 단위(변수)를 주제로 다룬다. 이 공격은 주로 '선험적 입장(a priori ground)'에 대한 것으로, 초정상적 아이디어와 정상적 과학분석의 필수조건 사이의 정의적인(definitional) 불일치를 문제삼는다. 마지막으로 방법론적 비평가는 연구의 작업적, 절차적 양상을 문제로 삼는다. 이것은 경험 통계적 분포 대신에 이론의 사용, 반증성의 문제 등을 포함한다.
이외 다른 유형은 생략하고, '스켑틱'은 새로운 주변 아이디어에 대한 태도로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냉담 형(dry) 스켑틱'은 이런 아이디어를 내는 사람을 그리 심각하게 볼 필요가 없다고 본다. 약간의 센스를 가진 사람이라면 그 아이디어가 완전한 사이비라는 것을 안다. 정체폭로(debunking)에 필요한 것 이상으로 그들의 아이디어를 이해하고 증거를 조사하는 것은 시간낭비에 불과하다. 우리는 그들의 아이디어를 조롱 삼고 다른 사람들도 그것을 어리석은 것으로 알게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보는 입장이다.
이러한 유형의 '스켑틱'으로 흔히 가드너(Martin Gardner)를 든다. 이 경우에 초정상의 주장자는 '스켑틱'이 '닫힌 마음'을 가졌다고 공격한다. 자신들의 말을 경청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스켑틱'의 측면에서 인생은 짧다. 허위 주장을 전부 조사하는 것보다는 할만한 일이 더욱 많다. 이제까지 초정상 현상이나 UFO에 대해 많은 조사를 하여오지 않았는가. 그런데도 아직 증거가 없다. 그것은 낮은 수준의 증거이므로 쉽게 거절된 것이다. 그런데 또 그런 것을 조사할 필요가 있을까?
사실상 아시모프(Isaac Asimov)의 말대로 과학적 주장을 구분하는 3가지 분별 과정(triage process)이 있다. 예를 들어 누군가 실험실에 10Kg의 소금을 갖고 있다고 할 경우에 그것은 '평범한(mundane)' 것이다. 아무도 그것을 믿지 않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실은 그리 흥미가 없다. 다른 예로 실험실에 10Kg의 금을 갖고 있다고 할 경우에 약간 의심을 할 것이지만 한번 보자고 할 것이다. 이것은 '특별한(unusual)' 것에 해당된다. 그리고 만일 누군가가 실험실에 10Kg의 아인슈타이늄(Einsteinium)이 있다고 할 경우에 아마도 '허튼 소리(bullshit)'라는 말로 대응할 것이다.
'냉담형 스켑틱'은 '허튼 소리'에 해당되는 것을 조사할 필요가 있겠느냐고 말하겠지만, 초정상의 주장자는 이를 '스켑틱'에 대항하는 강력한 무기로 활용한다. 그래서 흔히 "스켑틱스에 대해 스켑티컬 해야한다(Be skeptical of the skeptics)"라고 응대하는 것이다. 이런 공격의 빌미를 차단하는 태도를 가진 '스켑틱'이 앞서 언급한 트루지와 같은 '심약 형(wet) 스켑틱'이다. 이들은 만일 어떤 초정상 주장에도 공정한 청취를 제공하지 않는다면 위험성이 따른다고 믿는다.
역사상 그런 경우가 있지만 실제로 옳은 사람을 놓칠 가능성도 있다. 또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들에게 공격의 무기를 주는 셈이다. 이 때 이들은 인신공격(ad-hominem attack)과 너절한 논리로 공격하여 우리를 자신들의 수준으로 낮출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우리가 진정으로 합리적이라면 적어도 그들에게 증거의 제시를 요구하고 이를 기초로 우리의 반대 증거를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럴 시간이 있을까? 인생은 짧지 않는가? '냉담 형' 또는 '심약 형'을 절충한 태도를 가질 수밖에 없다. 다만 '스켑틱'은 절대로 사이비 과학과 타협하지 않는다는 사실만을 분명히 해 두어야 할 것 같다. 사이비 과학을 공격한다면서도 타협의 목적으로, 사이비 과학의 주장자가 흔히 '스켑틱'을 공격하는 표어인 '닫힌 마음'을 '진정한 스켑틱'에게 동원하며 자신은 '열린 마음'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거짓 스켑틱'은 구별해 내야 할 것이다.
4. 참고
1) Paul Kurtz, Introduction, in A Skeptic's Handbook of Parapsychology, Paul Kurtz, ed., Prometheus Books, Buffalo, New York, 1985.
2) Gerd Ho"velmann, An Annotated Bibliography, in A Skeptic's Handbook of Parapsychology, Paul Kurtz, ed., Prometheus Books, Buffalo, New York,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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