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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과학/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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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과학 바로알기 / 저자 서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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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kopsa
날짜 : 99-11-21 18:48
조회 : 4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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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2월 23일 확인)
신과학 바로알기 / 저자 서문
포맷에 맞추어 교정까지 끝냈다는 출판사의 말을 듣고 나중에 우송하도록 부탁하고는 런던 행 비행기를 탔다. 이번에는 여유가 있어 이곳 저곳 돌아볼 수가 있었다. 약발견사에 관한 책을 쓴 일도 있어 별렀던 웰컴 의학사 전시실이 있는 '과학박물관(Science Museum)'을 찾았다. 진열된 고대 의학사 장면은 인간에게 질병이란 무엇인지, 고대인간의 필사적인 지혜가 어떻게 사변적 원리체계를 구성하게 하였는지 다시 확인시켜 주었다. 의약 효과의 과학적 증거 이전에 그 체계의 유래를 확인하는 것이야말로 과학성을 가리는데 더 없이 중요하다. 이러한 대체의학을 가치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우리의 현실에 대한 우려야 말할 수 없을 만큼 크다.
'과학박물관'에서 여류 작가 플레밍(Martha Fleming)의 '원자론과 물활론(Atomism & Animism)' 전시회를 발견한 것은 뜻밖이었다. 전시회의 대표 표제는 인도 국립박물관 소장품인 18세기 무명작가의 파슈 수채화(그림)에서 나온 것이다. 플레밍은 '원자론'을 말한 다음에 '물활론'을 "물체-즉 원자가 만드는 물질이 모두 어떤 종류의 영(spirit) 또는 힘(force)을 갖고 있다는 믿음이다"라고 표현하였다. 이어 "이 두 가지 아이디어는 고전문화와 그 이전에 그리고 어떤 문화에서는 서양보다도 더 오래 전부터 지속적으로 믿어 왔던 믿음이다"라고 말한다.
플레밍은 "이 두 상이한 아이디어가 상호 어떤 관련성을 띠는지, 그리고 과학적 사고를 포함한 인간의 생각패턴에 관해 무엇을 가르쳐 주는지?"라고 제시한다. 처음 힘을 눈에 보이는 물체들의 운동의 맥락에서 이해하던 과학은 이제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 물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만유인력, 자기력 등에 존재하는 '힘의 장(force field)' 개념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힘의 장'의 발견은 인간의 문화 속 '물활론'에 덕 입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또한 크룩스(William Crookes)가 설계한 방전관 안에 든 몰타섬(Maltese) 십자가 모양이 우연일까? 플레밍은 이와 같이 다양한 과학관련 물체뿐만 아니라 장난감, 예술 작품 등을 보여주며, 그녀의 말대로 "서로 교차하는 그리고 때로는 과학의 역사를 벗어나는 많은 사회적, 정치적 그리고 개인적 사건을 물체 그 자체로서 나타낸다....나는 상이한 물체 사이뿐만 아니라 상상과 발견, 감정과 아이디어 사이의 유사성에 대하여 당신의 관심을 끌기를 원한다"라고 말한다. 그녀는 진정으로 물체를 보는 방법을 가르치려고 한다.
그래서 바로(Remedios Varo)의 1963년 캔버스 유화(그림)를 예로 들었다. 이 작품을 '원과 타원(Circle and Ellipse)'으로 해석한 그녀는 눈을 날카롭게 뜨고 유사성에 존재하는 유사점과 차이점을 바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원인가? 타원인가? 즉시 한가지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아가 비트겐슈타인 (Ludwig Wittgenstein)의 1930년대 초 노트를 다음과 같이 인용하기도 했다.
"역사적 해석, 발전의 가설로서의 해석은 일종의 자료의 요약일 뿐이다. 우리는 자료 사이의 관련성을 균등하게 잘 파악하여, 시간에 걸친 발전에 관한 가설의 형태로 만들지 않고 그들을 일반적인 그림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에 가설적 연결은 단지 유사성, 즉 사실 사이의 연관성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타원을 원으로 서서히 변화시킴으로써 원의 타원에 대한 내적 관련성을 설명할지 모르나 사실 속에 주어진 타원이 역사적으로 원으로부터 나왔다고(발전의 가설) 단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형식상 연결을 찾기 위해 눈을 날카롭게 해야 한다고 하기 위해 그렇게 해야 한다."
플레밍은 "비트겐슈타인의 원과 타원은 사물 사이의 형식상 연결을 보기 위해 눈을 훈련시켜야 한다는 은유이다"라고 말한다. 나아가 그녀는 다양한 19세기 운동학 모델(kinematic model)을 보여주며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의 사고실험을 말한다. 아인슈타인의 구체와 타원체는 공간에서 각자의 축에 따라 회전하고 있다. 아인슈타인은 묻는다. 두 물체로 이뤄진 물리 계가 그 안 물체의 상이한 거동을 말해 줄 원인을 포함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는 단순히 그 원인은 그 물리계 외부에 존재하는 어떤 것(먼거리 질량)이라고 말한다. 눈에 보이는 계안에서만 인과론을 찾으려고 한 고전역학의 인식론적 결함을 극복하여 바로 보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때 플레밍은 "다양한 모델들의 형(Form)을 우리가 형성하고 있을 때에 그 형이 어떻게 우리를 형성하는지?"라고 음미한다. 그러나 필자는 그녀가 쿤(Thomas Kuhn)과 함께 이성에 도전한 포스트모던 선조라고 불리는 비트겐슈타인을 인용하였다고 해서 바로 그 상대론적 인식론을 암시하려고 했다는 인상을 받지 않는다. 또한 그녀가 아인슈타인을 인용하였다고 해서 신과학에서 흔히 말하는, 아인슈타인의 전일론적 접근이 환원적 과학을 극복할 새로운 과학의 패러다임이라는 류의 주장을 지지하려 했다는 어떤 것도 발견하지 못한다. 또한 물활론과 원자론을 대비했다고 해서 신과학적 생기론의 의미를 부각시키려 했다는 증거는 없다. 다만 그녀가 이 전시회에서 여러 형의 물체를 제시하며 어떻게 눈을 날카롭게 할 것인지, 무엇을 발견할 것인지를 말하고자 한다는 것을 안다.
필자가 이 '과학박물관'의 전시회를 흥분 속에서 감상한 이유는 과학의 창조성이 어떻게 나올 수 있겠는지 새삼 깨달았기 때문이다. 우리 주변의 소위 신과학자들은 자신들이 세계를 보는 새로운 눈을 갖고 있다고 말하지만 이들의 상대방 과학자에게, 이 전시회가 주는 교훈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어 보인다. 내가 세계의 일류 과학자가 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어떤 과학자건 과학자들은 상상적 가설 설정 단계에서 바로 바라보는 눈에 따라 창조성의 질이 결정되며 전 시험과정에서 이 자질뿐만 아니라 기술과 조심성 그리고 인내를 필요로 한다.
과학자의 탐구가 인고의 과정인 이유는 더 높은 창조적 통찰은 물론 통찰을 사실화하는 과정의 객관성의 달성이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의 신과학 철학자들은 지식과 사실의 개념이 배경적 믿음에 의해 결정되는 '관념적 속임수'라고 말하며 아주 단순히 과학에 "객관성이란 없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아니면 편리한대로 양자론을 적용하여 주관성을 절대로 배제할 수 없다고, 아니 현대 과학문명의 문제가 주관성 가치의 상실에 있다고 부각시키며 주관성의 가치를 역설한다. 이들은 과학의 객관적 지식에의 도달이 이들이 생각하듯 쉽지 않다는 사실을 모른 채, 그렇게 쉽게 과학적 방법 내지 과학을 무효화하는 철학을 전개하고 있다.
이들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인간의 식량. 에너지. 보건 문제의 해결과 환경오염 등 부작용의 제기와 해결이, 현재의 과학이 아닌 무엇인지조차 불분명한 과학을 초월한다는 '신과학'으로 이룰 수 있다고 믿는 것일까? 이들이 자신의 '믿음' 또는 '바람'을 역설할 방편으로 과학을 공격하며, '객관적 참(眞)의 부정' 철학을 전개하며 고대인의 사변적 생기론적. 목적론적 체계와 손잡고 마음껏 날아오를 때 그것은 지적 기만 이상이다.
우리의 신과학 기술자 그룹은 이보다 더욱 악성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스스로 과학자이면서도 과학을 뛰어넘는다는 소위 '신과학'에는 거리의 약장사나 다름없는 별개의 룰을 적용하여 이렇게 만들어 낸 '쓰레기 과학'을 '과학'으로 둔갑시켜 과학의 이름으로 믿게 한다. 이들이 신문, 방송, 잡지, 책에 자신을 선구적 과학자로 알리기에 급급한 사이, 선량한 국민은 과학과 이성에서 날아올라 미신의 골로 깊게 빠져들고 있다. 더욱 불행히도 이들은 일부 정치인과 연계하여 자신의 허황된 믿음을 국민의 세금으로 지원 받겠다는 일도 꾸미고 있다. 이보다 더욱 부끄러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서투른 솜씨로 과학이야기를 통해 과학을 바로 알리는 일을 시작한 필자는 어느날 갑자기 이들 거짓 신과학이 바른 과학을 온통 오염시키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거의 끝나 가던 과학 이야기 책 집필을 접어 두고 시작한 신과학 문제 바로 알리기 작업이 언제 끝이 날지 모른다. 1998년 <신과학은 없다>(지성사)를 지었고 이 책 다음에 한두 권쯤 더 쓰리라 마음먹고 있다. (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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