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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퀴리 부인의 사생활, 시련의 극복(박근혜 의혹을 보고)
  글쓴이 : kopsa     날짜 : 12-08-01 15:39     조회 : 5592    
퀴리 부인의 사생활, 시련의 극복(박근혜 의혹을 보고) 

요즈음 박근혜의 사생활 의혹이라는 것이 보도되고 있는데, 무엇이 진실이건 그 오래전의 일이 현재의 박근혜와 무슨 관련이 있겠는지 생각합니다. 이 부분, 따로 링크하지 않고 모르는 분은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박근혜 사생활 의혹은 아래 퀴리 부인의 이야기로 말할 수 없을 것이나, 시련의 극복이라는 점에서 ‘흥미 있고 진지한 과학이야기’의 제3장 3. 퀴리 부인의 사생활, 시련의 극복을 소개합니다. 

‘흥미 있고 진지한 과학 이야기’ 내용 소개 및 목차
http://www.kopsa.or.kr/gnu4/bbs/board.php?bo_table=Books&wr_id=17
 
3. 퀴리 부인의 사생활, 시련의 극복   

[1921년 퀴리 부인(Marie Curie, 오른쪽에서 두 번째)은 두 딸, 이렌(Irene, 오른쪽에서 세 번째)과  이브(Ive, 오른쪽에서 첫 번째)와 함께 미국 여행에 오른다.]

마리 퀴리(1867-1934)는 어느 여성 과학자와 마찬가지로 과학자, 아내,  어머니의 역할을 갖고 있었다. 1895년 피에르 퀴리(1859-1906)와 결혼한 마리는 1897년 첫 딸 이렌을 낳았다. 그리고 둘째딸 이브는 마리와 피에르가 방사선 연구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다음 해인 1904년 태어났다. 이렌이 태어나자 마리는 과학적 연구를 포기하지 않고 이 작은 이렌과 가정을 어떻게 돌보아야 하는지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 그러나 피에르와 가족의 도움으로 그는 이브가 태어나서도 잘 견뎌내었다. 

1906년 피에르가 불의의 사고로 사망했다. 마리는 소르본 대학의 피에르의 자리를 계승하는 영광을 얻게 되었고 연구에 바쁘게 지냈다. 이런 가운데서도 그는 두 딸을 키우는 일에 신경을 써야 했다. 이렌은 동생인 이브와는 전혀 달랐다. 그는 아버지를 닮아 지적이며 이성적이며 과학을 좋아했다. 그리고 별로 웃지를 않고 신경질적으로 보였다. 이것은 매력적이며 항상 들떠 있는 동생과는 딴판이었다. 이브는 후에 어머니의 자서전을 쓰기도 한 작가가 되었다. 

마리는 프랑스 교육 제도를 좋아하지 않았다. 교육 환경이 나쁠 뿐만 아니라 사고가 아니라 암기 교육이 많았다. 그리고 성격이 색다른 이렌의 교육에 특별히 신경을 써야 했다. 그래서 1907년 이렌이 10살일 때 마리는 동료 교수들과 함께 사설 협동 학교를 운영하기로 뜻을 모았다. 여섯 명의 교수가 각기 매주 한 차례 자신의 집에서 10명의 자녀에게, 장 페랭과 폴 랑제방은 물리화학과 수학을, 마리는 실험 물리학을, 또 누구는 문학과 예술과 어학을 가르치는 식이었다. 이렌은 2년 반 동안 이렇게 교육을 받고 다음에 사립학교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1914년 소르본 대학에 입학하여 화학을 공부하였다.
     
[프랑스의 우익 언론은 마리 퀴리가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 회원에 입후보하자 심지어 필적과 관상을 근거로 한 야비한 인종차별적 주장으로 공격하였다.]

마리의 생애에 1910년에서 1913년 사이는 ‘스캔들과 회복’ 기간이다. 이 기간의 일들은 그를 산산이 부셔놓은 스캔들보다는 그가 어떻게 회복할 수 있었는지, 마리의 참 모습을 알 수 있는 기회가 된다. 1910년 11월 마리는 물리학자 몫으로 공석이 생긴 프랑스 과학아카데미(과학학술원) 회원으로 입후보했다. 그의 경쟁 상대는 무선전신에 기여한 66세의 에두아르 브랑리였다. 1909년 마르코니가 노벨상을 받았을 때 프랑스 인 중에는 그가 상을 받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분위기였다.

정치적으로 브랑리는 보수 가톨릭의 지지를 받았으며 마리는 진보 그룹에 속해 있었다. 우익 언론은 마리가 유대인이며 진정한 프랑스인이 아니기 때문에 아카데미 회원의 자격이 없다는 온갖 소문을 쏟아냈다. 또한 당시 여성과학자는 차별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1911년 1월 결과는, 두 표 차이로 브랑리가 선임이 되고 마리는 상처를 입었다. 마리는 다시는 아카데미 잡지에 글을 쓰지 않았고 회원으로도 입후보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해가 다 가기 전에 마리 퀴리의 사생활이라고 부를 수 있는 5세 연하인 동료 물리학 교수 폴 랑제방(1872-1946)과의 스캔들이 신문에 실렸다. 친구로부터 신문을 받아든 이렌은 ‘러브 스토리. 마담 퀴리와  랑제방 교수’라는 글을 읽고 얼굴이 하얗게 되어 기절했다. 랑제방 교수는 바로 이렌에게 수학을 가르친 선생님이었다.

그리고 랑제방은 후에 이렌의 남편이 된 프레데릭 졸리오의 스승이다. 랑제방은 1924년 졸리오로 하여금 라듐 연구소를 찾아 마리를 만나도록 하였고 조수로 채용되자 마리는 이렌에게 실험 방법을 가르치는 임무를 맡겼다. 2년 뒤에 결혼한 졸리오 부부는 최초로 인공 방사성 원소를 생성한 업적으로 1935년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그리고 후에 졸리오 부부의 딸이 랑제방의 손자와 결혼했다고 하니 마리와 랑제방의 인연을 헤아릴 수 있다. 

랑제방은 마리의 남편인 피에르의 학생이었으며 피에르를 존경하였다. 그는 성적 매력이 풍부했고 베푸는 성격이었다. 그러나 1902년 결혼은 행복하지 않았다. 네 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부부간 갈등이 심했다. 심지어 부인과 처가 식구에 의해 구타당한 흔적을 하고 실험실에 나온 적도 있었다. 1910년 7월 중순에는 랑제방이 집에서 나와 살았는데 그 아파트는 마리의 실험실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38세에 남편을 잃고 어린 두 아이를 키우던 마리의 빈자리를 채워 줄 남성이 필요했으며 폴 랑제방이 그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마리가 점심때에 폴의 아파트를 방문해서 식사를 지어준 것이 단순한 배려였는지 특별한 관계였는지 둘 사이의 관계를 폭로한 사람이 폴의 부인인 잔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추리할 수 있다. 잔이 고용한 사람이 1911년 부활절 경에 누군가의 아파트에 침입하여 편지를 훔쳐내는 데 성공했다. 1910년 마리가 폴에게 보낸 편지에는 잔과 별거하라고 제시한 부분이 있는데 수잔 퀸의 <마리 퀴리의 생애>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폴에게 잔과의 성 관계에 대해 쓰며 마리는 ‘우리에 관해 알고 있는 모든 사람이, 아아 이미 많은 사람들이 대단히 심각하게 판단할 것이기 때문에’ 잔이 다시 아이를 갖는다면 참을 수 없을 것이라고 적었다. 만일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우리 사이의 분명한 결별....나의 인생과 당신에 대한 나의 위치를 위태롭게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러나 나는 나와 당신과 내가 존중하는 사람들의 면전에서 이 불명예를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결별을 의미할 것이다. 마리는 ‘당신의 부인이 이를 이해했다면 이 방법을 즉시 사용할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 그것을 그녀에게 말해 주었는지도 모른다’고 덧붙였다.”

이것만으로 마리와 폴의 관계가 간통사건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히 둘이 예사로운 관계가 아니었음을 느끼게 한다. 편지를 확보한 직후 신문의 편집인으로 있던 잔의 한 친척은 마리를 방문하여 잔이 편지를 확보하였고 스캔들이 곧 터질 것이라고 전해 주었다. 집에서 나온 폴은 잔에게 금전적으로 보상할 목적으로 돈이 필요하여 마리로부터 5,000프랑을 빌렸으나 위협을 막지는 못했다. 단지 시간을 벌었을 뿐이다.

그리고 1911년 11월 4일에 파리의 가장 큰 신문인 <르 주르날>에는 이렌이 읽은 대로 ‘러브 스토리. 마담 퀴리와 랑제방 교수’라는 기사가 실렸다. 그 첫 대목은 다음과 같이 시작했다. “그렇게 신비스럽게 비추던 라듐의 불꽃이...그렇게 헌신적으로 그 작용을 연구하는 과학자들 중 하나의 가슴에 불을 당겼다; 그리고 이 과학자의 부인과 아이들은 눈물 속에 있다.”   
 
[1911년 브뤼셀의 솔베이 학회의 사진. 앞줄 오른쪽 두 번째에 마리가 보인다. 그리고 랑제방(Paul Langevin)이 제일 오른쪽에 서 있고 그 옆에는 아인슈타인의 모습이 보인다.] 

마리와 폴의 스캔들은 이미 여름에 소문이 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마리는 연구와 활동에 몰두해 있었다. 그는 7월에는 네덜란드의 레이덴으로 여행하여 오네스를 만나기도 했다. 10월 말에는 브뤼셀의 솔베이 학회에 참석하기 위해 파리를 떠났다. 그런데 회의가 끝나던 날인 11월 4일 스캔들이 터진 것이다. 마리가 폴과 함께 외국의 학회에 참석한 것에 감정이 상한 잔과 잔의 가족이 신문사에 알려 둘 사이의 스캔들을 기사화 하도록 한 것이다.

브뤼셀에서 학회 일정을 마치고 파리로 돌아온 마리는 성난 시민들이 집과 실험실에 모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들은 잔에 대한 한없는 동정을, 남의 가정을 파괴한 마리에 대한 분노를 갖고 있었다. 이런 일이 있던 1911년 마리는 “나의 과학적 연구와 사생활간에는 아무 관련이 없다고 믿는다....나는 과학적 연구의 가치에 대한 인정이 사생활에 대한 중상과 모략에 의하여 영향을 받아야 한다는 아이디어를 원칙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변호하였다.

이때 물리학계는 마리를 구원하기 위해 나서지 않았다. 이들은 마리에 대한 언론의 반응이 지나쳤다고 변호할 수도 있었는데 침묵으로 일관했으며 단지 영국의 아일톤이라는 여성 엔지니어가 은신처를 제공하여 기자와 성난 사람들을 피하도록 했을 뿐이다. 어쩌면 라듐과 폴로늄의 발견 공로로 두 번째의 노벨상을 수상한 것이 마리를 구했는지도 모른다.

1911년 11월 7일, 스캔들이 터진 다음에 스웨덴 왕립 과학 아카데미는 마리를 노벨 화학상 수상자로 결정했다. 이들은 노벨상이 사람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연구에 준다는 원칙을 따랐다. 그렇다고 아카데미가 스캔들을 걱정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 주재 스웨덴 대사가 브뤼셀에서 마리가 폴과 함께 있지 않았다는 정보를 제공하자 투표를 결정했다고 한다. 그러나 프랑스 언론은 로이터통신이 11월 7일 수상 결정을 알렸는데도 보도를 미루었다. 마침내 11월 9일 조그맣게 수상 소식이 신문에 나자 비로소 마리의 친구와 동료 과학자들이 마리를 지원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사건이 터졌다. 11월 23일 마리와 폴 사이에 교환했던 편지가 공개된 것이다. 이 편지는 브뤼셀에서 둘이 함께 하였는지가 아니라 둘 사이의 은밀한 관계를 부인할 수 없는 증거였다. 이로 인하여 11월 26일에는 폴과 신문의 편집인 사이에 권총 결투가 벌어졌다. 11월 29일 스웨덴 왕립 과학 아카데미의 위원인 스반테 아레니우스(1859-1927)는 마리에게 편지로 12월 10일 노벨상 수상식에 오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충고했다. 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도 있다.

  “만일 문제의 편지가 사실이라고 아카데미가 믿었다면 절대로 그것이 거짓이라는 적절한 해명이 없이는 상을 주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아우리빌리우스[아카데미의 사무총장]나 나에게 전보로, 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그리고 다음에 편지로 랑제방 공판이 당신에게 주어진 혐의가 절대로 근거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전에는 상을 받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편지를 쓸 것이라고 알려주기를 희망한다.”

이는 스웨덴 아카데미 위원이 스캔들이 노벨상 수상 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때 마리는 다른 위원에게 “내가 아레니우스를 친구라고 여겼던 적이 있는 것을 아는가”라고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아레니우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아카데미의 의도와 의견을 헤아릴 책임이 나에게 있다고 믿지 않는다. 따라서 나는 내 신념대로 행동해야 한다. 당신이 조언한 행동은 내 측에서 볼 때 중대한 오류인 것으로 보인다. 사실로 상은 라듐과 폴로늄의 발견에 수여된 것이다. 나는 나의 과학적 연구와 사적 생활의 사실들이 관련이 없다고 믿는다.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의견을 갖고 있다고 확신한다. 나는 당신이 같은 의견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을 보고 대단히 슬퍼진다.”

[1차 대전이 발발하자 라듐 연구소의 마리 퀴리(가운데 여성)는 150명의 여성에게 X선 기술을 가르친다.]

마리가 노벨상 수상식에 참석한 것은 그의 가장 용감한 행동이었으며 만일 굴복했다면 그 뒤 장래는 어두워졌을 것이라고 말한다. 마리는  1911년 12월 10일 노벨상을 받고 파리로 돌아와 1912년 1월 대부분의 시간을 병원에서 보냈다. 심한 우울증과 콩팥의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3월에는 콩팥 수술을 하고 다시 몇 달을 회복하여야 했다. 이때 그는 파리 근처에 마담 스클로아우스카라는 이름으로 집을 구했다. 그는 이렌에게 조차 마담 퀴리라고 편지를 하지 못하도록 했다. 피에르의 이름을 쓸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으리라. 그리고 1912년 12월 3일에 14개월 만에 실험 노트에 기록을 남겼다.

1914년 파리 대학에 라듐 연구소가 완공되고 그리고 제1차 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이렌의 도움을 받아 간호사에게 X선 진단법을 교육하였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 재정이 어려웠을 때 1921년 두 딸과 함께 미국으로 가서 하딩 대통령을 만났다. 이제 마리의 스캔들은 산산이 흩어지고 그는 다시 영광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참고 자료
Quinn, Susan, Marie Curie: A Life. Perseus Publishing, New York, NY, 1996.
Marie Curie and the Science of Radioactivity. http://www.aip.org/history/curie